2006/04/11 13:22

그와 그녀의 사정

지난달 말부터 겁스 ORPG를 하게 되어 캐릭터의 배경과 시트를 작성해서 마스터와 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내 캐릭터는 여성이었는데, 나는 그 캐릭터의 배경을 작성할 때 한 번도 대명사를 쓰지 않고 캐릭터의 이름을 곧이 곧대로 몇 번이고 써넣었다. 이유인즉슨, 나는 아직 '그'와 '그녀'를 각각 남성과 여성의 3인칭 대명사로 사용해도 될 것인지에 대해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터 생각해온 문제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생각해 보면 나는 아마 내심으로는 통성으로서의 '그'를 지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통상적으로 여성을 지칭할 때는 '그녀'라 부를 것을 기대할 터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길 가벼운 혼동이나 오해, 혹은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이 싫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쉽게 '그녀'를 쓰는 것도 탐탁치 않아 아예 대명사를 피해 버린 것이다.

오래 전에 통신 모임의 오프라인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며칠 후 또래의 한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사람이 자꾸 말끝을 흐리는 거다. 눈치를 보아하니 모임에서 이미 말을 놓기로 한 바 있지만 아직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망설여졌던 모양이라 그 부분을 지적하고 합의를 보았다. 그러니까 캐릭터 배경을 작성할 때의 내가 선택을 보류한 것은 그 비슷한 경우였던 셈이다. 전에 올린 포스트 '술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 한편 남성을 지칭할 때는 대명사가 통성이든 남성이든 다 해당되니 편하게 '그'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개운치만은 않다.

'그녀'란 말이 생긴 내력이나 자세한 논점을 일일이 적다간 지금보다도 더 장황해질 테고(사실은 이미 그렇게 쓰다가 그 난감함을 뼈저리게 느꼈으므로;), 당장 내가 느끼는 불편함만 간략히 적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그'에 '女'가 붙어 '그녀'가 되었음은 명백해 보이는데, 그게 참 괘씸하다. '그'가 통성 대명사로서만 쓰이다 성별 구분이 요구되자 원래의 '그'라는 어휘 자체는 놓아둔 채 사실상 남성이 계승하고, 표준인 '그'에 여자라는 꼬리표를달아서 여성 대명사만 분리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굳이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쓰던 상황에서도 그 기준은 암묵적으로 남성이 독점해 왔고, 같은 어휘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셋방살이를 하던 여성은 말을 나눠야 될 상황이 오자 이렇게 딱지 하나 붙은 채 별칭이 되어 떨려나는 거다. 당연히 표준은 남성이라는 발상, 무척 불편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보다도 남성 대명사로서의 '그'가 더 차별적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공평하게 '그男' 따위의 말도 만들었으면(--;) '그' 또한 통성 대명사로서의 위치를 고스란히 유지했을 텐데(그럼 두번째 문제도 생기지 않았겠지) 여성형만 따로 내놓았으니 '그'의 지시 대상도 모호해지는 것이다. 원래는 통성 대명사인데 '그녀'와 대칭으로 쓰이면 남성 대명사가 된다. 아직 통성 대명사로서의 용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점점 더 약해질거다.

'그녀'가 마뜩치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굳이 대명사에 성별 구분이 필요한지의 문제이다. 그야, 서구 언어를 번역할 때 유용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나도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사용한다. 그게 원문의 의도를 훨씬 정확하고 편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될 테니까. 언젠가, 아직 '그녀'의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의 책을 읽으며 나는 끝없이 '그 여자'라는 대명사 아닌 대명사를 만나야 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번역이 아닌 한국어에서도 인칭 대명사에 반드시 성별의 구분이 필요할까? 일, 이인칭 대명사에는 그런 것이 없다.

물론 각기 장단점이 있다고 말하면 그뿐이긴 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주장되는 다양한 젠더를 존중한다면 반드시 인간을 남녀 둘 중의 하나로 나눌 수밖에 없는 구조는 작은 폭력일 수 있고, 좀 모호한 경우가 생기면 남성이 표준이 되기 쉽다는 점도 또 다른 부작용이다. 굳이 차별까지는 아니라 해도 삼인칭으로 사람을 부를 때 언제나 그 사람의 성별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것보다는 - 그것은 끊임없는 구별이니까 - 통성적 대명사를 사용하는 게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성별을 구분하는 어휘를 잃는 것이 일종의 손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성별에 따라 꼭 대명사를 따로 써야만 한다는 것도 또 다른 강제가 될 수 있다(특히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한 가지 표현을 잃는 대신 다른 표현을 되찾는 셈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두 표현이 공존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겠는데, '그'가 겹치는 바람에 그게 어렵다. 굳이 한 가지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와 '너'처럼 성별은 물론 모든 차별적 요소에 상관없이 사람을 단지 사람으로서 지칭할 수 있는 어휘가 있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것은 그렇고, 구어에서는 어떨까? 구어에서는 '그'든 '그녀'든 삼인칭 대명사가 별 힘을 못 쓰는 대신 성이나 관형사 뒤에 지위나 관계에 따른 적절한 호칭을 붙여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보통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그 사람'을, 좀 맛을 내고 싶을 때는 '그 양반'이란 말을 즐겨 쓴다.) 생뚱맞지만 '그녀는'과 '그 년은'의 발음이 같아서 구어로 쓰기에 꺼려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사실 이게 구어적으로 생겨난 말이었으면 의식적으로 저 둘이 발음상으로 차이가 나도록 변했을 텐데, 역시 문어적인 요구로 만들어진 말답달까. 어쨌거나, 구어로서는 저변을 넓히지 못했어도 문어로서는 '그녀'도 상당히 널리 쓰이고 있고, 특히젊은 세대일수록 '그녀'에 익숙한 것 같다. 갈수록 통성 용법의 '그'는 남녀 용법의 '그'와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녀'를 다른 말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발음의 문제를 제외하면 별 차별성을 못 느끼겠다.

자, 통성적인 '그'를 잃기 싫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녀'의 성립 과정에서 생긴 차별적 요소는 언제나 되어야 탈색되는것일까. 벌써 '그녀'는 고착되어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그에 대해선 난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소년'과 '소녀'도 비슷한 경우인데, 김규항 씨의 블로그를 보면 그 사람이 간행에 참여하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어린이 교양지의 '어린이' 대신 좀 더 포괄적인 어휘로 대체할 수 없을까 논의하던 중 소년이라는 후보가 나왔으나 남성적인 느낌이 있다는 지적 때문에 보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좀 옆길로 새는 느낌이지만 서구 언어는 성별을 꼬박꼬박 나누다 못해 무성인 대상에조차 성을 부여하곤 하는데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한국어가 서양 언어보다 남녀를 구분하는 어휘를 조금이나마 덜 쓰는 점이 좋다. 해방 이후 많은 어휘가 본래의 용법보다는 서양 언어에의 번역어 내지 대응어로서 종사하는 데 바쁘게 된 것도 이런 상황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는생각이 든다. 언어야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게 완전히 정착되어 역사적/가치적 맥락이 증발해 버린 후라면 오히려 거리낌 없이 쓰겠는데, 아직은 그렇게 훌훌 떨칠 상황까진 아닌 거 같다. (차라리 이젠 괜찮다고 누가 말해주면 솔직히 난 참 편하겠다.) 최소한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나는 '그녀'라는 말을 쓰는 데 계속 망설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 문제를 간단히 말하면, 옳다고 여기는 대로 쓰자니 호환이 잘 안 되고(언어란 게 결국 소통을 위한 것인데), 다수가 쓰는 대로 따르자니 영 불편하고, 결국 대명사 자체를 피하다 보니 어색하다는 거다.

*2005년 3월 27일 이글루에 올렸던 포스트.

*수정: 새로 올리면서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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