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11 07:00

류씨를 류씨라 부르지 못하고

좀 지난 소식이긴 하지만, 며칠 전 이런 기사가 났었다.

요는 호적 예규에 따라 한자로 된 성을 한글로 기재할 때는 한글맞춤법의 맞게 표기해야 하므로 두음법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고유명사인 성을 행정예규 때문에 바꾸는 것도 곤란하고 공식 성 다르고 실제 성 다른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그에 앞서 두음법칙의 불합리성을 먼저 지적해야 되겠다.

두음법칙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공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그 흔적이 보인 후 개정안마다 점점 적용 범위가 넓어지다 1989년 한글학회가 고시한 '한글맞춤법'에 따라 확정된 규정으로서 간단히 말해 ㄴ이나 ㄹ로 시작하는 한자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때 ㅇ이나 ㄴ으로 적으라는 것이 골자이다(구체적인 사항은 한글맞춤법 두음법칙 참조). 분명 당대의 시류도 고려해야 할 요소이고 발음의 편의성도 퍽 중요한 문제이나, 그것을 '표기'상의 '법칙'으로 규정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애초에 딱히 절실한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 안목 없이 표기법부터 바꾼다는 발상을 해버린 것이 문제다.

한국어에 한자어가 많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한글을 사용하는 한 그 많은 동음이의 한자어를 일일이 구분할 방법은 없다. 맥락을 통해 특별한 설명이 없이도 어떤 한자어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한자를 병기하거나 주를 달아야 뜻이 명확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ㄹ 첫소리 한자들을 ㅇ이나 ㄴ으로 바꿔 놨으니 혼동이 가중되는 것이다. 이론(異論)과 이론(理論), 여권(女權)과 여권(旅券) 등 두음법칙으로 인해 동음이의어가 양산되었는데 한글 표기만으로는 그것을 구분할 방법이 없으니 문자 생활이 더욱 불편해지는 것이다.

사실 두음법칙은 내적으로 일률적이지도 못하고 직관적이지도 않다. 이름과는 달리 두음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며 엄밀히 말하면 두음이라고 다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모음이 붙느냐 혹은 어느 음절 뒤에 오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예외도 있어 헛갈리기 쉽고 복잡하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쉽지 않은 한글맞춤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앞서의 끝말잇기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ㄹ로 시작하는 말이 워낙 적어 말을 잇는 재미가 없다 보니 두음법칙 인정이라며 지난 단어 끝음절의 첫소리 ㄹ과 다음 단어 첫음절의 첫소리 ㅇ이 호환되도록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단어 떠올리기에도 바쁜 끝말잇기에서 두음법칙의 까다로운 규칙을 엄수할 리가 없다. 원칙이고 뭐고 없이 ㄹ과 ㅇ(혹은 ㄴ도)을 무조건 잇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벼운 놀이조차도 맞춤법을 무시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두음법칙이 발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라면 왜 한자어에만 적용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라디오(Radio)의 라는 발음하기 쉽고 라체(裸體)의 라만 발음하기 어려운가? 정말 ㄹ이 그토록 발음하기 어려워 두음법칙을 제정해야했다면 고유어와 외래어 등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한자가 아닌 외래어가 앞으로 점점 많이 들어올 텐데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큰일 아닌가. 과연 외래어 표기법를 개정하여 라디오 대신 나디오라고 적도록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아무리 봐도 세계 각국에서 ㄹ 소리를 멀쩡히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만 제한 규정을 둘 또라진 이유가 없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r과 l처럼 한국인이 듣기엔 서로 유사한 ㄹ 발음까지 구분해서 사용할 정도가 아닌가? 혼동의 여지도 없는 ㄹ 소리 하나조차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한국인의 발음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일본에도 한국처럼 많은 한자어가 있지만 한국인들이 발음 짧다고 자주 비웃는 일본인들도 ㄹ로 시작하는 한자어를 두음법칙 없이 얼마든지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말의 본래 소리를 외국에서 더 잘 살려 쓰는 희극도 종종 연출된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성은 로(盧)이나 두음법칙에 따라 노로 표기되는데, 오히려 영어로는 Roh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흔히 李, 柳 등의 성을 영어로 적을 때는 ㄹ 발음을 살려 Lee, Ryu 등으로 하면서 정작 한글로는 한국인의 성을 제대로 표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글로 표현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적으면 틀리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이씨에게 외국인이, "당신은 한국에선 '이'라고 불리면서 왜 나한테는 '리'라고 부르라고 합니까?" 물으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현재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고 본음을 살리고 있는데, 북한식 조선어가 우스개 코드로 정착해버린 남한에서는 그 독특한 어조가 어색하거나 가소로울 수 있으나 두음법칙 없이도 언어생활에 별 지장이 없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첫소리 ㄹ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데, 남한 사람에게만 유별나게 어려울 이유도 없다. 첫소리의 ㄹ이 어색한 것은, 그만큼 그것을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북한을 언급할 것도 없이 해방 후 두음법칙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까지만 해도 한자의 ㄹ과 ㄴ 발음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 배울 때 다른 발음에 비해 조금 더 어려울지는 모르나, 약간의 연습만 있으면 무난히 발음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안 쓰다 보니 더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감히 고무찬양죄를 범하면서 한마디 하자면,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북한이 잘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문제는 애초에 방향이 틀린 것이다. 발음을 편하게 하려고 표기법까지 손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ㄹ은 ㄹ로, ㄴ은 ㄴ으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ㄴ이나 ㅇ으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고, 표기에 있어서는 발음상의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ㄹ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몇 가지 이미 바뀐 발음으로 굳어진 단어는 인정하는 정도로 규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첫소리의 ㄹ이나 ㄴ 발음을 보다 쉬운 소리로 바꾸어 내는 일은 '법칙'이 아니라 '현상'으로 허용함으로써 처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구개음화, 자음동화 등의 발음 전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표기법까지 '미닫이' 대신 '미닺이'로, '원로' 대신 '월로'로 바꾸지는 않는 것처럼, 두음법칙 역시 두음현상 정도로 규정해도 될 일이었다.

한국어에서 발음이 두 가지인 경우가 따로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조사 '의'는 원칙상 '의'로 발음해야 하나 '에'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고, '맛있다'와 같은 동사는 '마디따'와 '마시따'의 발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두 가지 발음을 모두 허용했다면 필요에 따라 평소에는 쉬운 발음을 사용하다가 의미를 명확히 해야할 경우에는 원칙대로 발음하는 등,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더욱 편리한 언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첫소리의 ㄹ 발음을 좀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한글학회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고유명사인 사람의 성을 원래대로 표기조차 못하게 함이랴. 최소한 이 정도는 예외 규정으로 두어야 한다. 북한 룡천 사고 때 龍川을 용천이 아닌 룡천으로 부른 것은 그것이 고유명사였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기본적으로 원칙론자이기 때문에, 지금이 막 두음법칙을 제정할 당시였다면 원음 고수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 기간에 걸쳐 두음법칙이 일반화된 마당에 첫소리 ㄹ을 원칙대로 다시 사용하라고 한다면 반발이 클 것이다. 당분간 어색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려니와 많은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친북 시비가 불거지거나 '때가 어느 땐데',  '경제도 어려운데' 운운하기 시작하면 거의 일은 틀어진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때 이제 와 두음법칙을 아예 돌이키기는 어려운 일일 터라 차선책으로서 '(한시적) 본음 및 두음현상 동시허용안'을 생각해본 것이다. 물론 이조차 실제로 이루어지긴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2004년 11월 9일 이글루에 올렸던 포스트.

*수정: 새로 올리면서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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